사랑하기에 무죄
작가 노희경은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작가는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유죄인 이유를,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을 스스로 내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사랑을 이루셨기에 무죄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기에, 하늘로부터 온 '사랑'을 외면하고 제거할 방법만을 고민하며 세월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세족 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날이지요. 누군가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다른 이의 발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결코 그 발을 씻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셔서, 마침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정작 예수님의 진짜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왕은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신 분”(막 10:45)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붙은 그 명패는 세상이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오히려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한 사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골 목수 예수는 ‘유대인의 왕’을 넘어 만국의 왕, 만왕의 왕,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분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기어이 사랑을 이루고자 하셨던 왕이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신”(빌 2:10) 온 우주의 참된 왕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무죄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의 왕”이라는 고백의 명패를 달아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도 바라봅니다. 부끄럽고 연약한 우리의 손이지만, 이 작은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나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아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